목련
깊은 생각을 솜털씨에 얹어
목련은 다른 꽃을 압도하는 것처럼 순백의 고귀한 꽃을 피웁니다.
다른 꽃에 앞서 묵묵히 계절을 이끄는 목련은 김복동 할머니를 생각나게 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위해 항상 사람들 앞에 서서
"우리가 힘을 합치면 실현할 수 없는 일은 없다" 라고 말씀 하시는 할머니.
그 모습이 '고귀'라는 꽃말을 가지고 따뜻한 자애가 느껴지는 목련이 겹쳐 보입니다.
故 김복동 할머니
1926년생 김복동 할머니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가사를 돕고 있었지만,
1941년, 15세(만 14세) 때, 일본군 「위안부」로서 강제 연행되었습니다.
중국 광동, 홍콩, 수마트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자바, 싱가포르 등을 이동하면서
5년간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었습니다.
너무 괴로움, 괴로움으로부터 자살을 도모한 적도 있었지만,
싱가포르에서 한국 독립을 맞아 미군의 포로 수용소에 수용된 후 귀국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후, 혼자 생활을 계속해 왔습니다.
1992년 TV를 보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한 후
1993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 참가하는 등
"내가 할 수있는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오셨습니다.
そして1945年3月23日、米軍の大規模な空襲に遭った日から、裴奉奇さんは戦争のまっただ中を生きることになりました。
日本の敗戦後は、沖縄に動員された朝鮮人の多くが故国・朝鮮に戻りましたが、同胞の集団から外れ、
朝鮮への帰還船の出発日も知らなかった裴奉奇さんはひたすら沖縄の地をさすらい続けました。
当時の心境を裴奉奇さんは次のように語っています。
「一番はじめは、もうどこへ行っても落ち着かんさね。あっちへ行って一晩、こっちへ行って三晩、よくおったのが一週間。
もう歩き通しさね。……はじめはどこか行って「女中に使ってくれんか」って行ったら、
まだ若いから「どうぞ」と言って入れるさね。
「女中はいるから上でサービスしなさい」って言うさ。もう一日中歩きどおしだから、
「客場」におって居眠りした時もたくさんあったよ。
お客が酒飲んでるのに、その前で居眠りして夢まで見る。それで、一晩泊まって朝起きたら、またどこかへ行きたい。
昨日来て「使ってくれ」って入って、そこを出る時、「家へ行って着替えをとってくる」そんな嘘ついて出てくる。
一日中歩いて暗くなる。
暗くなっても寝るところがない。また飲み屋に行くのよ。小遣いは一銭もないさね。
2,3日おってバス賃ができたらまたよそへ行く。
着替えも何もない。風呂敷包み一つ頭にのせて、一か年はずーっと歩きどおしだった。どこに行っても落ち着かない。
落ち着かんのよ」(川田文子著『赤瓦の家』より)
90세를 넘어도 수요일 시위에 참가해 사람들에게 차세대 평화에 대해 말한 김복동 할머니는 2017년
미래 세대를 위한 지원과 전시성적 폭력 피해자의 연대를 위해 '김복동 평화기금'을 창설하였습니다.
1991년 10월 18일, 봉봉기씨는 몰래 숨을 쉬었다.
사망 봉기 씨가 죽고 딱 49일째가 되는 12월 6일, 사망 봉기씨의 49일의 추도식이 행해진 그 날에,
김학순씨가 도쿄지방법원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일으켰습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자칭하고, 그 후의 각국 피해자들의 명제를 촉구한 김학순씨도, 봉봉기씨의 존재를 알고,
기봉기씨의 추도식에 조위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사봉기씨의 49일의 추도식과 김학순씨의 제소의 날이 겹친 것은 우연이지만,
하지만 사봉기씨의 생각이 김학순씨의 명승으로 이어졌고, 그 후 많은 피해자들의 따뜻함에 용기를 주었다.
그 일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을까 생각되지 않습니다.